The Gwiae Pavilion

귀애정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경북 민속문화재 162호 귀애정

조선 후기 학자이며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돈령부 도정, 공조 참의를 지낸 귀애(龜厓) 조극승(曺克承 1803~1877)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자와 사당을 세웠는데, 200여년전 건립된 조극승의 생가 바로 옆에 두었다.
원래 이 자리는 귀애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마루방 상부에 있는 유조집서년(柔兆執徐年 병진년) 청명절에 쓴 김여락의 귀애정 기문과
손자 세환(世煥 1861~1942)의 기문으로 볼때 1915년이나 1916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은 귀애정과 같은 년도에 창건되었으며 이때의 규모는 2칸 규모 였다.
그 후 귀애 선생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그 뒤 1978년 현재의 3칸으로 증축되었다.
단기4311년 무오 2월 15일의 중수 상량문이 사당 종도리 장혀 하단에 있다.

건축현황

귀애정은 귀애 고택의 향 좌측옆 야트막한 야산 우목산(牛牧山) 아래 동북향으로 건립되어
멀리 안산인 보현산과 귀애 선생이 10경(景) 중에 하나라고 노래한 화악산 을 바라보고 있다.
정자 앞에는 방형(方形)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는 둥근 섬을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육각 정자를 섬 내에 두었는데 이 건물은 1959년 사라호 태풍때문에 도괴되었으며 2009년 복원하여 육각정과 나무다리를 만들어 통행하도록 하였다.
귀애정 앞에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길이 1m, 높이 50~60cm 정도 의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1990경 어느날 도난당하고 말았다 한다.
2010년 8월 15일 귀애공의 4세손인 준호, 필호 형제가 돌거북을 복원하였다.
그 후 누마루 근처의 마당에 120㎠ 정도인 거북형상의 돌확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다.
연못은 3면이 담장없이 터져 있는데, 일반적인 영남의 별서정원의 수법은 주위에 담장을 둘러 폐쇠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나
여기는 오히려 개방적으로 처리하여 호남 원림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귀애정은 장대식의 기단위에 두 칸 온돌방, 한 칸 마루방, 한 칸 온돌 방을 기본 구성으로 한 뒤,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두어 뒷마루와 계자각 난간을 시설하고 배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벽장과 툇마루를 가설하였다.
또한 한 칸 온돌방 앞에는 누마루를 돌출시키고 계자각 난간을 돌려 정자의 운치를 한껏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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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는 수월루(水月樓)라고 칭하였고, 방앞의 툇마루는 몽희헌(夢喜軒)이라 하였다.
수월루는 외부 3칸 모두에 4짝 들문을 두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
외부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고 내부는 각주를 세웠는데 특이하게도 배면 툇마루 상부에는 전면과 같이 창방을 돌리고 화반을 두었다.
이는 벽장을 몸체에서 달아내어 평면을 확장하는 일반적인 수법과 는 달리, 벽장을 외진(外陣)기둥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2칸 온돌방 측면에는 밖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외여닫이 세살 문을 두었는데, 조선 말기부터 이루어진 건축의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우물마루를 깐 한 칸 크기의 마루방은 전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 을 달고 배면에는 판벽에다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대청의 좌우 온돌방 사이에는 팔각 형의 불발기가 있는 사분합 들어 열개문으로 경계를 하였다.
온돌방의 정면과 측면은 머름중방위에 모두 양개 여닫이 세살문을 두고 안으로 미닫이문을 달았다.
기둥 위에는 초익공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보머리와 살미가 직절된 1900년대의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첨자와 보아지 및 화반의 가장자리는 연꽃으로 초각하여 19 세기의 장식적인 면을 간직하고 있다.
가구 외 구성은 5량으로 처리하여 둥근 대량위에 동자주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종량을 놓은 후 사다리꼴 판대공을 두었는데 외부의 장식에 비하여는 매우 소박하게 처리하였다.
누마루는 3량으로 가구 하였다. 건물의 현재 관리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소유자와 그 친척들의 건물에 대한 애착심이 매우 높았다.
사당은 귀애정의 향 우측에 따로 담장을 둘러 공간을 형성하였다. 석축으로 마감한 높은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내부는 바닥에 교의(交椅) 대신에 2자정도 높이로 마루를 들여 그 위에 다섯 분의 위패를 모셨다.
정면 세 칸 모두에 굽널이 있는 양개 세살문을 달고 기둥위에는 첨자를 생략한 초익공으로 꾸몄다.
살미위에는 만개한 연꽃을 올리고 보머리에는 봉두를 조각하여 놓았으나 배면은 살미를 직절하여 전혀 장식 없이 처리 하였다.
가구는 3량으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지붕 측면은 방풍판을 달았다.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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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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